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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인터뷰
[연재기고] 이충걸 (전 GQ코리아 편집장) “커피 한 잔과 이데올로기”
2025.06.09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도시에 있는 커피 머신 수천 개가 동시에 멈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정적 속에서 무엇을 듣게 될까? 혹시 시스템 너머의 목소리가, 오래 외면해 온 음향이 들리지 않을까? 


서울은 ‘아토초(Attosecond, 1초를 100경으로 나눈 극히 짧은 순간)’로 움직인다. 지하철은 몇 분 단위로 정차하고, 상권은 몇 달 만에 바뀌며, 사람들은 작은 화면에 사전 몇 권의 감정을 퍼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도시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은 딱 하나다. 카페.


5월 오후의 필동, 한때 인쇄소였던 건물 2층은 원두 향으로 포화된 채였다. 이야기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 회의를 하는 사람, 눈을 감은 사람. 모두가 커피라는 전도체로 공간을 재구성하여 메가시티의 엔진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카페인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단일한 신경계로서. 



ESG / ESG오늘 / 이에스지



카페를 예술의 역사로 돌려 말하자면, 커피잔은 하나의 정물화다. 사물의 완결성보다 관계의 미결성을 상징한다. 이때 커피는 풍경을 조각내고, 리듬을 붙이고, 관계를 정의한다. 공포에 젖은 현실 감각을 깨우는 날카로운 의례, 직장의 모멸을 견디는 방법, 회식 전 잠깐의 도피, 이별의 허무를 어르는 치유의 방식. 이윽고 라테 거품은 아침이 힘들고, 관계가 어렵고, 감정이 금방 닳는 시대에 모두를 지탱해 주는 방어막이 되었다. 이 행성의 마실 것 중에 오직 커피만이 버틴다는 감각을 선사할 것이다. 


대한민국 어른 한 명이 1년에 커피 수백 잔을 마신다는 통계보다, 커피가 서울이라는 고밀도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가 두 배 인상적이다. 프랜차이즈와 독립 카페, 디저트 카페와 테마 카페, 심지어 커피 없는 카페는 교회보다 강력한 권능으로 도시를 장악했다. 이건 어떤 병리일까, 아니면 진화의 한 형태일까? 완전히 커피에 미쳤다. 오후 세 시의 바리스타는 과테말라 산 원두를 직접 로스팅해 산미를 살렸다고 설명했지만, 입 안에는 커피보다 고요가 먼저 퍼졌다. 감각은 늘 조용히 말을 건다. 커피 안에 잠시 육신을 숨기도록. 


커피는 두 개의 시간을 지난다. 조명 아래서 라테 거품을 보며 SNS에 올릴 사진을 고르다 목울대로 넘기는 소비자의 시간. 과잉과 선택과 자존감의 양식. 콜롬비아의 새벽 다섯 시, 고도 1,800미터의 비탈을 오르는 생산자의 시간도 있다. 기후 변화로 말라가는 땅을 붙잡는 무릎의 시간. 두 개의 시간이 커피에 섞이면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한다. 누가 만들었을까.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이때 ESG는 불균형한 시간을 매만지는 불완전.



ESG / ESG오늘 / 이에스지

 

나에게 커피 잔 밖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현실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온종일 혀 끝을 만지는 쌉싸래한 여운은 남반구의 소녀가 먼지를 들이마시며 수확한 시간의 맛이었다. 이른 새벽 고산지대의 습기, 기후 변화의 예언서, 탄소의 무게, 불투명한 공급망의 그림자, 벌레 먹은 커피콩을 골라내는 소년의 손마디, 룽고 한 잔이 남긴 이산화탄소의 발자국, 유기농이라는 품사로 위장한 해충제, 공정무역의 이상한 미소의 껍질, 커피 브랜드의 회계장부, 먼 항구와 뱃길의 냄새가 은은히 섞인 채. 


오늘 내가 마시는 5,800원짜리 라테의 하트모양 스팀밀크 거품은, 말하자면, 브라질의 골짜기와 바다 사이에 갇힌 소작농의 손에서 출발해, 코스타리카의 협동조합, 스위스의 수입상, 암스테르담의 가격협상 테이블, 동남아의 세척공장을 거쳐 온 결정체이자, 도덕적 유체이자, 지구의 기압 차로 사출된 액체이다.


노동은 뜨겁고 길다. 소년 소녀 노동자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바구니를 들고는 일회용 컵 안에서 시계태엽처럼 돌고 있다. 아름다우나 잔혹하게는 비치지 않도록 설계된 체계. 그게 지금 이 커피인 것이다.


아침을 깨우는 알람이 잠들지 않는 자책의 서사로 변형되는 과정에는 무엇을 마시느냐보다 어떻게 마시느냐에 대한 질문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 커피는 진짜 착한가? 이 커피를 마시면 진짜 좋은 사람이 될까? 중요한 질문은 늘 그런 식, 복잡하고, 모호하고, 미묘한 산미와 죄책감이 소용돌이친다. 꼭 커피처럼. 



ESG / ESG오늘 / 이에스지



한국인은 빠르다. 효율을 사랑한다.


ESG의 속도는 때로 뒤처진다. 혹은 너무 느려서 지치게 만든다. 어떤 날은 커피를 마시는 과정조차 피곤하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부터. 뭘 마시지? 라테? 아메리카노? 콩은 어떻게 갈아달라고 하지? 중간? 굵게? 우유는? 내 성격의 반은 결정 장애, 나머지 반은 결정 끝의 죄책감. 커피 한 잔 주문하면서 나는 무기력과 죄책감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너무 많은 선택지,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도덕. 모든 것과 모든 것의 무한대.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인류가 정교하게 분할한 노동의 결과물. 좋은 소비자가 되려는 강박과 윤리적 무감각 사이에서 줄타기한다. 그런데 ESG 프레임이 그 줄타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순간에도, 마시고 바로 버린다는 테이크아웃 커피의 모토는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빨대 문제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대하는 태도에 참견하는 것이다.


화가가 색과 선을 조심조심 캔버스에 얹듯, 오늘 바리스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사뭇 수묵화 화가처럼 원두, 물, 온도, 시간, 손의 형태를 조절한다. 분쇄된 원두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소리, 주전자의 가는 물줄기가 천천히 뿌려지는 광경은 이 시절이 커피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축약한다. 그 틈새로 의지가 드러난다. 사실 ESG란 의지의 다른 이름 아닌가. 


집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 나도 그렇게 물을 붓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부풀어 오르는 커피를 응시한다. 몇 분 동안 커피라는 세계의 시민이 되어. 그런데 그 감각은 오만이었다. 나는 노동하지 않았고, 땀을 흘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직접 겪지 않았다. 커피를 골라 마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소비자의 특권이었다.



ESG / ESG오늘 / 이에스지



내가 진심으로 윤리적인 커피를 마셨다고 확신한 건 6년 전, 수요일 오전 11시 37분이었다. 정확한 시간을 아는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노출 콘크리트가 공간 전체를 두른 브루클린의 카페에서 사파이어색 염색 머리와 이(李)자와 죽(竹)자, 레터링 타투로 휘황한 바리스타의 어깨를 보며 '풍부한 베리 향과 다층적인 시트러스의 여운, 끝에서 꽃향기가 올라온다'고 소문자로 적힌 콜롬비아 카우카 커피를 주문했다. 한 잔에 7.25달러 하는 커피 이름은 놀랍게도 '네 아이의 향기'였다. '마리아의 언덕', '비 오는 오후의 온기'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콜롬비아 여성 농부들의 공동체가 지었다고 했다. 메뉴에 농장 이름과 가공 방식, 산지의 고도까지 표시했다는 사실은 자랑이 아니라, 상상 이상의 존중감이었다. 커피 한 잔을 둘러싼 또 하나의 서사, 다감하고 명료한 메시지는 위협도 고발도 없이 나의 분별에 윤리를 뒤섞었다. 지속가능성이 디자인 요소로 기능할 수 있다니.

 

그러나 '공정무역' 마크를 볼 때의 안도감은 무지와 통했다. 소비자의 지위로 배지를 보며 일종의 면죄부를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커피 재배 농부에게 공정한 삶이 보장될까? 일상소비의 정치성 또는 아주 사적인 문제로서 나는 어떤 소비자가 될 것인가? 누구를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건드릴 것인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외면하며, 얼마나 책임질 수 있을까? 나는 완벽하지 않다. 완전한 무지도 아니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커피 한 잔으로 착한소비라는 서사에 포섭된 채 도덕적 자아를 다독이며 스스로를 구원하려 했다.



ESG / ESG오늘 / 이에스지



공간은 책임을 감춘다. 혹은 드러낸다. 강남대로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는, 하루 수천 잔의 커피가 오가는 동안 거의 아무런 정보도, 출처도,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반면, 을지로 상가 3층의 카페 구석에는 원두포대 자락이 놓였다. 바닥에 닿은 마대는 커피 원산지, 땅, 노동자의 체온까지 매장에 참여한다고 선언한다. 이때 ESG는 슬로건 대신, 공간의 선택과 배열, 재료와 구조, 커피잔과 휴지통 사이의 윤리로 드러날 것이다. 


지금 몇몇 프랜차이즈는 일회용 컵을 줄였고, 텀블러를 쓰면 소액을 할인해 준다. 동전 몇 개가 기업윤리와 환경보호라는 거대한 어휘를 어떻게 감당할지는 몰라도. 제주의 커피숍은 플라스틱을 녹여 컵 받침으로 쓰고, 강릉의 로스터리는 산지 노동자와 직거래 구조를 만들고, 포항의 소규모 카페는 커피 찌꺼기를 지역비료로 제공하고, 망원동의 커피 하우스는 재활용 목재로 테이블을 만들었다. 조용하고 더딘 방식의 저항, 느리고 제한적이되 문화적 감수성을 조율하는 태도로서. 사람들은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보다 '불편함'이라는 낱말에 훨씬 민감하다. 그러나 디테일은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지하는 장치와 같다.


ESG란 결국 불편을 받아들이는 관대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소비자가 편의를 잠깐 유보할 때, 시스템은 도약할 여지를 가질 것이다. 혁명이라기보다 미묘한 균열이랄까. 하지만 균열이 세상을 바꾼다.


올봄에 에티오피아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의 시를 읽었다. 



해 뜨기 전,

이 땅은 숨을 고른다.

진흙 길에 내 발자국이 찍히기 전까지

나는 그림자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

바구니는 비어 있고

손은 기억을 되새긴다

이마에 떨어지는 땀보다 먼저

햇살이 붉은 열매를 부른다.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내 딸의 발소리를 떠올린다

내 손톱 밑으로 스며든

껍질의 붉은 즙,

무너진 손마디,

나는 커피나무 그늘을 떠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신다. 정확히는 내 꿈의 여운을 마시고, 내 망설임의 끝자락을 핥고, 내 도덕의 명확함을 씻는다. 이 시간을 회복이라고 부르려다 말고 나는 읊조린다. 이 커피는 누구의 삶을 지나왔을까. 커피 위에서 부유하는 모든 것을 삼키지 않고서는 더 이상 커피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by 이충걸(에세이스트, 전 GQ코리아 편집장, 장편소설 ‘너의 얼굴’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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