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말해줘. 그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게. 그 공식은 노래에도 자동차에도 옷에도 통용된다. 누가 파텔 필립 노틸러스를 찼을 때 그것이 허세인지 취미인지, 자기를 존중하는 방법인지는 그 사람 말고는 모르는 일이다. 둘 다든 아니든 상관없지만, 욕망은 언제나 이중적이라는 진실만큼은 자기도 부정할 수 없을걸. (흔하디 흔한 '명품백', 너절한 조어가 주는 감정이 비싼 가방이라는 물리적 실체 이상이듯이.) 아무튼 지갑을 여는 마음의 뒷마당엔 필시 비교와, 권력 이미지, 어쩌면 다소 간의 좌절감이 지글거릴 것이다)
어느 목요일, 내가 아는 신흥 부자가 시계를 사러 갔다. 아니, 시계를 사러 갔다고 믿었다. 그가 본 시계 매장은 일종의 종교 시설이었다. 유리 문 저 안쪽으로 사제들은 엄숙한 낯빛으로 금속을 다루고 있었다. 문 앞의 대기 행렬은 성체를 기다리는 신도처럼 들떠 보였다. 그러나 입장 불가, 공기는 순환하지 않았다. 문지기를 그를 들이지 않고 친절하게 냉대했다. "지금은 물량이 없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올려드릴까요?"
돈을 갖고도 학대 받는 이들은 값을 묻는 대신, 언제 받을 수 있냐고 읍소했다. 그러나 스태프는 시간을 말하지 않고 자격을 물었다. 그는 돈이 아니라 시간의 자격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자문했었다. "이 시계를 차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 "시간이 나를 지배할까, 내가 시간을 소유할까?" 그러나 의구심은 당장 무의미해졌다. 그는 곧바로 소유되는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노예도 아니고, 시계의 노비도 아니고 브랜드의 시종이자 상품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가격표에는 세금이 없는 대신 허영세(虛榮稅), 사회가 부과한 일종의 통행세가 딸려 있었다.

진열대 위에서 빛나는 시계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인간보다 오래 사는 금속의 유전자였다. 매장의 시계 초침은 욕망을 수거하여 광택을 내고, 거울처럼 반사하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정지된 시계의 초침은 도리어 인간의 심장을 따라갔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물건이, 시간의 상징이 되다니. 그런데 그 시간을 소유하려면, 일정 수준의 자아를 포기해야 하다니. 시간의 감각을 사고 팔며 저자 거리의 서열을 따지고, 본능을 정밀하게 디자인하는 기계의 결핍은 거의 존재론적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기다림 속에서 그는 자기 존재감을 측량했다. "나는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자본이 길들인 새로운 시간 윤리였다. 사고 싶어도 박대하는 시계는 왜 희소성이라는 인위적 장치 위에 군림할까?
제한된 물량이 시장에서 가치를 부풀리는 장치로 작동한다면 그 시계는 친환경 친사회적 사물이라기보다 심리•사회•경제적 껍질을 몇 겹 뒤집어쓸 것이다. 그래서 ‘돈 있어도 못 산다’는 시계가 속출한다. 한때 기술력과 내구성으로 손목시계 세계에 이름을 새긴 브랜드들은 자기네 시계가 장기적 기능을 충족하도록 설계되어 몇 세대나 물려줄 수 있다고 홍보하지만, 그 전에 지금 시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건 내지는 자기 과시 내러티브가 되었다. 현상태의 상징, 지위 굳히기, 부와 취향의 객체,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가치. 사후까지 전해지는 어떤 메시지, 내구성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선 지속적인 개념.
개인의 성공을 상징으로 전환시킨 시계 마케팅 전략의 결과, 예약 대기에 오픈 런이 버젓한 현실이 되고, 돈다발을 흔들어 본들 시계 코빼기도 못 보는 상황이 속출한다. 돈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젊음이나 맛집 뿐인 줄만 알았더니 시계도 있었구나.

시계를 찬다는 것은, 시간을 보이는 행위이다. 손목에서 금속이 반짝이는 순간, 시간은 시각적 기호가 된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가려진 것을 전제한다. 시계는 시간의 표면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 흐르는 삶의 질감은 가려버린다. 그가 손목에 얹고 싶어 했던 반짝이는 기계는 시장과 사상의 복합체였다. 그는 시계가 제공하는 모험과 명성과 자신을 연결할 수 있다고 자기를 속였기 때문에. 솔직히 궁금했다. 왜 그렇게 비싼 시계를 갖고 싶어 할까? 시간을 소유한 기분이 들어서? 그렇지만 시간을 지배한다는 환상은, 사치의 정물이며 허영의 반사 아닌가? 까놓고 얘기하자면, "나는 이만큼 성장했다" 대신 "나는 물건 하나로 나의 가치를 말한다. 나는 시계를 찼다"는 말이 더 용감해 보인다. 그건, 나는 이 정도의 시간을 딛고 섰다는 선언이니까. 내가 어느 시간을 살았고, 또 살아낼 거라는 출사표로서.
사실 특정한 시계는 위세와 계급 메시지를 부른다. "네가 감히 이 시계를 차겠다고?" 매장 앞에서 그 돈 갖고도 초라해진다는 건 시계가 힘과 배제의 상징이라서가 아닌가. 그런데 신분의 증표에는 사회적 불평등의 그림자가 겹친다. 나는 자꾸만 묻고 또 묻는다. 비싼 시계를 찬 사람의 시간은 산 시계를 찬 사람의 시간보다 가치 있을까? 보이는 시간과 가려진 시간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계는 시간의 측정 도구이기 이전에, 사회적 질서를 재현하는 사물인 동시에 돈이 시간을 포장한 형태이다. 당장이 아니라 미래를 산다는 약속에는, "내 시간은 일회성이 아니야, 내 시간은 멈추지 않아"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 시계를 찬 사람은 사회적으로 더 정돈된 리듬, 그러니까 스케줄러의 시간, 약속의 시간, 계약의 시간에 속한다. 이때 비싼 시계는 그냥 정밀한 기계가 아니라, 한 시절이 보는 법을 학습시키는 물건으로 작동한다. 어떤 의미로 비싼 시계를 찬 사람은, 그 반짝임 위에 사회적으로 번역된 시간을 두르고 다닌다. 다른 의미 체계에 속한 시간, 사회적 가치로 환원된 시간. 그때 시계는 사회가 인정한 세월의 보상인 셈이다. 그는 말없이 말한다. “나는 내 시간을 이렇게 사용했어. 나는 이 만큼의 고생, 이 만큼의 성공, 이 만큼의 인정을 거쳐 이 시곗바늘을 얻었어. 나는 이만큼 왔고, 이만큼 하고 있어. 쉽게 말해서 나는 여기 있어.”
시계를 갖는다는 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신호.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소유되는 것.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시장의 것. 그러니까 비싼 시계는 시간의 예술이지, 자본의 마술이 아니라는 건 순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가치와 위세를 구별하는 눈을 부릅떠야 한다. 위세는 주목을 끌고, 권세를 암묵적으로 증명하고, 타자의 시선을 엔진처럼 돌려세우기 때문에.
모든 시계는 기실 시간의 지배라는 시스템을 이룬다. 그리고 비싼 시계에는 보이는 시간이 흐른다. 그의 나날은 찰나와 같으니 회의와 약속, 비행기와 통화로 하루를 쪼갠다. 시간은 일정표의 형태를 띠고, 고도로 압축되어 있으며, 효율적이다. 사실 자본은 시간을 관리하는 자의 편이기도 하고. 공장 시계, 출근 시계, 회의 시계, 그리고 손목 위의 브레게. 비싼 시계가 상징하는 보이는 시간의 허상과, 그 반대편, 물질과 감정의 층위. 누군들 시간이 가격으로 계산되는 교환의 논리와 무관할까?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건 대체로 잘 모른다. 돈은 다시 시간을 산다. 비싼 시계를 찬 사람의 시간은 시계의 주인이 시간을 살만 한 위치라는 증빙 자료인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의 분당 가치가 고임금으로 환산되고, 그가 늦는 10분이 누군가의 하루치 노동과 맞먹는다면.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 효율은 인간적인 여백을 덜어내 쉼표가 없다. 시계가 정확할수록, 삶이 조금씩 틀어질 거라는 건 나태한 관찰이겠으나, 어떻게 살아도 인생은 기대보다 짧은 것을.
역으로 이 시계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를 과시의 대상으로 삼는지, 아니면 동반자로 여기는지. 실제로 기계 자체가 ‘내 시간은 귀하다, 세대를 넘어간다’고 말한다면, 그 언어가 허상에서 기어 나왔는지, 당신 내면에서 천천히 자란 것인지 살펴 봄직하다. 시계가 당신 친구가 되든, 당신이 시계 주인이 되든, 자기만의 시간 위에 한가롭게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

때로 세대를 넘어 물려주라는 시계의 슬로건이 마냥 애절해 보인다. 세대를 넘어? 나는 내 세대에 이미 지쳤는 걸? 솔직히 나는 그 슬로건을 "니 처지를 알고 정확하게 망상해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맞춰 가치 소비의 풍조 속에서 냉소 분위기가 치솟는다. 그 시계를 찰 만한 비슷한 재력과 명성, 자랑하고 싶은 업적과 우아한 관심사의 나열, 끝도 없이 움직이는 사람의 신뢰성, 나와 닮은 사람만이 그 시계를 찰 수 있다는 주장은 더 이상 같은 경외심으로 존중받지 않는다. 그 시계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수요를 관리하려는 시장의 겉멋인지, 시간이 지나도 건재하다고 우기려는 순진함인지, 누가 자기 손목에 채운 기계를 보고 "아, 저 사람은 이렇게 살았구나", 읊어 주길 바라는 결핍 때문인지는 하등 상관없다. 이젠 시계에 새로운 종류의 영웅이 필요할 때가 됐으니까.
이때 다른 질문 하나가 고개를 든다. 모든 시간의 흐름에는 땀과 지루함과 기다림과 이름 없는 찰나가 섞여 있을 텐데, 유리판에 금 도금도 없이 마구 싼 시계를 찬 사람은 안개 속에서 꿈틀대는 익명의 시간을 보낼 뿐일까? 그 사람의 시간은 느슨하고 불규칙하기만 할까? 시계도 없이 버스의 시간, 대기의 막간, 몸의 리듬에 의존하는 사람의 하루가 금방 지나갈 리 없다. 대기하고, 이동하고, 반복하며 사는 이의 길고 지루하고 감춰진 시간에는 여백이 흐드러진다. 계산할 수 없으나 살아 있는 시간이, 생각이 자라나는 공간이, 잠깐 멈춰 허공을 올려다 볼 틈새가. 초침이 들리지 않는 시간은 시계가 정지된다 해도
불안하지 않다. 그건 살아 있는 육신의 운율로 흐르는 시간이기 때문에.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 것이다.
찬란한 시간은 기록되지 않는다. 사진으로 남지 않고, 초침으로 측정되지 않으며, 몸의 기억 속에 흩뿌려진다. 장식도 증명도 없이. 그렇다면 가장 비싼 시간은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흘러가는 시간일지 모르겠다. 그날, 엄마 손의 감촉, 혼자 앉아 바람을 느끼는 석양 무렵, 스승의 병상 옆에서 밤을 새는 며칠, 아이를 재우고 숨을 고르는 사이, 그 사람을 기다리다 지쳐 돌아오는 안동 역의 새벽.
위세의 시계와 당신이 사는 태도는 지각처럼 뒤틀린다. 당신은 지금 하루하루를 어쨌든 살고 있고, 11월의 바람에 부르르 떠는 나무를 보며 술잔을 든 채 잠깐 웃는다. 그때 너무 비싼 시계가 당신의 덤덤한 시간과 얼마나 어울릴까? 고요하되 부피가 큰 시간을 얼만큼 차지할까? 당신의 시간은 가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 선언과 같다. 그러므로 시계를 차건 아니건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를 보며 술잔을 들 수 있어야 한다. 시계가 시간을 가리는 대신, 시간이 시계를 초월해야 한다.

6.25 때 한 팔 가득 시계를 찼던 중공군처럼, 그 분이 자랑하는 서른 점 시계 컬렉션을 보고 집에 와 침대 협탁에 낡은 시계를 올려놓았다. 오래돼 부식도 보이고, 분침도 느리게 돌고 있었지만, 기분이 괜찮았다. 시간이 조금 늦게 간다고 인생이 느려지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시계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했다. 그럼 아무도 늦지 않겠지. 누구도 서두르지 않겠지. 그러나 시계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 인간은 또다시 분을 쪼개고, 초를 나누고, 남보다 빠르되 지각 없는 시간을 탐닉하겠지.
나는 현자 시늉을 하며 말했다.
"맞아. 진짜 시계는 내 안에 있었구나.”"
by 이충걸(에세이스트, 전 GQ코리아 편집장, 장편소설 ‘너의 얼굴’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