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국내 패션 업계가 소각장으로 밀어내는 미판매 재고의 시장가치는 약 1조 원으로 추산된다. 브랜드 희소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헐값에 털어내느니 태워 없애자는 선택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논리는 통하기 어렵게 됐다. EU의 '지속 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이하 ESPR)'에 따라 EU 역내에서 대기업의 판매되지 않은 의류, 의류 액세서리, 신발을 폐기하는 행위가 원칙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이다. EU가 과잉 생산과 재고 폐기를 더 이상 기업 내부의 비용 문제로만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ESPR 자체는 2024년 7월 발효된 규정으로 올해 7월 19일부터 대기업 제품을 대상으로 규정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규제의 직접적인 범위는 EU시장이지만 유럽에 제품을 판매하거나 유럽 브랜드의 공급망에 연결된 한국기업도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
ESPR로 규제변화를 체감할 패션업계
ESPR은 EU가 순환경제 전환을 위해 마련한 핵심 제품 규정이다.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 전 설계 단계부터 사용, 수리, 재사용, 재활용, 폐기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지속가능성 요건을 부과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ESPR 발효 전에는 2009년 제정된 에코디자인 지침이 있었다. 이 지침이 주로 에너지 관련 제품의 효율 기준을 다뤘다면, ESPR은 적용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식품, 사료, 의약품 등 일부 예외사항을 제외하면 EU시장에 출시되는 거의 모든 실물 제품이 향후 품목별 세부 규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에코디자인 규정 주요 내용 © 한국에너지공단]
ESPR로의 인한 변화 방향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제품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고장 났을 때 고쳐 쓸 수 있는지, 수명이 다한 뒤 다시 자원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다. 내구성, 수리 가능성, 재활용 가능성이 제품 경쟁력의 일부가 되는 구조다.
ESPR은 그 자체로 모든 품목에 즉시 적용되는 규정이 아니다. 품목별 세부 요건은 앞으로 위임법령을 통해 단계적으로 구체화 될 예정이다. 다만, 미판매 의류, 액세서리, 신발 폐기 금지에 적용되기 시작하며 패션 업계가 규제신호를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됐다.
7월 19일부터 시작되는 세 가지 변화
7월 19일부터 EU 역내 패션 대기업에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첫 번째 변화는 '미판매 재고 폐기 금지'다. 물론 예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안전상의 이유가 있거나, 제품이 심각하게 손상돼 사용할 수 없거나, 위조품처럼 시장에 유통해서는 안 되는 경우 등은 제한적으로 예외가 인정될 수 있다. 예외를 적용하기 위해 기업은 예외 사유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5년간 보관해야 한다. 예외 조항을 이용해 기존의 소각 관행을 사실상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째, 미판매 제품 처리에 대한 공시 부담이 커진다. ESPR은 기업이 폐기한 미판매 소비재의 수량, 무게, 폐기 사유, 처리 방식을 공개하도록 요구한다. 대기업은 이미 관련 공시 의무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으며, 2027년부터는 보다 표준화된 양식에 따라 보고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제품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이하 DPP)을 둘러싼 준비가 본격화된다. DPP는 제품의 원재료, 구성, 수리 가능성, 재활용 정보 등 지속가능성 관련 정보를 디지털 방식으로 노출하는 제도다. 소비자와 수리업체, 재활용업체, 규제 당국이 제품 정보를 더 쉽게 확인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업들은 앞으로 단계적으로 구체화 될 DPP 적용에 대응하기 위해 지금부터 공급망 데이터 수집 체계를 정비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ESPR 시행 예정 일정 및 주요 단계 © TÜV 라인란드(TÜV Rheinland) 공식 홈페이지]
유럽에 진출한 한국 패션기업의 과제들
ESPR은 EU 역내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대상으로 한다. EU에 의류나 신발을 직접 수출하는 국내 기업은 물론, 유럽 브랜드에 원단, 부자재, 완제품을 공급하는 협력사도 직간접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한국 기업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EU 시장에 제품이 놓이는가'다.
기후에너지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의류 폐기물 발생량은 연간 11만 톤을 상회한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의류 소각이나 폐기는 ESPR의 직접 규제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EU시장에 제품을 공급하는 기업이라면 국내 생산, 유통, 재고 처리 방식도 점차 검증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DPP가 본격화되면 제품 데이터는 원재료 조달, 제조, 유통, 사용, 수리, 재활용 단계까지 전과정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LF 헤지스의 첫 업사이클링 프로젝트 ‘리워크 컬렉션’ 포스터 © LF]
이와 관련하여 정부와 산업계도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유관 기관들은 DPP 대응을 위한 시범사업과 협의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섬유, 패션 업계에서는 재고관리, 재활용, 데이터 표준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LF 헤지스(HAZZYS)가 2023년 선보인 업사이클링 프로젝트 리워크(Rework) 컬렉션과 코오롱FnC의 중고 패션 플랫폼 확대처럼 재고와 순환을 연결하려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단, 미판매 의류 폐기 규제 대응은 DPP 대응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DPP가 데이터를 정리하는 문제라면 재고 폐기 금지는 생산량과 판매 전략, 할인 정책, 재판매 채널, 재활용 인프라까지 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패션 비즈니스 모델의 조정에 가깝다.
패션을 넘어 수출 산업의 이슈인 ESPR
ESPR의 적용 범위는 패션에만 머물지 않는다. EU 집행위원회는 '2025~2030 워킹플랜'으로 품목별 위임법령 채택 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2026년 중 철강 위임법령 채택이 예정돼 있으며, 2027년에는 섬유와 의류, 알루미늄, 타이어, 2028년에는 가구, 2029년에는 매트리스 순으로 채택이 이어질 전망이다.
이것이 ESPR 대응이 단순히 팔리지 않은 옷을 태울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위임법령이 쌓여갈수록 한국 수출 기업이 제품 데이터를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는지, 공급망 전반에서 환경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검증하는가 EU시장 접근의 전제조건이지 될 것이다. 규제의 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다.
by Editor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