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팔 차림이었는데, 이제는 패딩이 필요할 만큼 쌀쌀해졌다. 가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길었던 폭염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끈질긴 가을장마와 갑작스러운 한파가 전국을 덮치며 맑아야 할 가을 하늘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확철과 단풍철이 맞물린 시점에 반복된 장마는 농가와 관광지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요즘, 원인은 무엇일까?
10월에 장마가 찾아온 이유는
올해는 9월부터 전국적으로 강수일수와 강수량이 평년을 크게 웃돌았다. 9월 전국 평균 강수일수는 15.1일로 평년보다 약 6일 더 많았고, 강수량 역시 228.8mm로 평년 155.1mm를 넘어섰다. 10월은 더 심각했다. 서울에서는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3일부터 14일까지 12일 연속으로 비가 내렸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미 평년 10월 한 달 치 강수량의 두 배를 넘어섰다.
[긴 가을장마를 맞이한 서울 ⓒ 연합뉴스]
'가을장마'라 불리는 이상 강수 패턴이 올해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지난해에도 가을철 전국 평균 강수량은 415mm로, 평년 266.1mm보다 약 55% 증가했다. 이처럼 최근 몇 년 사이 가을철 강수량은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올해는 유독 짧았던 여름 장마와 대조적으로 가을비가 전국적으로 오랫동안 내린 이례적인 해다. 일반적으로 가을이 되면 남쪽 해상의 북태평양 고기압은 약해지고, 대륙 내부가 서서히 냉각되며 맑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기상청 분석에 따르면, 올해는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와 남쪽의 따뜻한 수증기가 만나 정체전선을 형성했고, 여기에 북태평양 고기압이 평년보다 오래 머물면서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한반도로 유입됐다. 결과적으로 대기 구조 자체가 평년과 달랐던 것이 이번 가을장마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끝나지 않은 비, 수확철 농가를 덮치다
이번 가을장마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농가다. 수확을 앞둔 시점에도 비소식이 이어지면서, 한창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할 농가는 시름에 잠겼다. 벼, 과일, 채소 등 다양한 작물이 병해를 입었고, 적기 수확이 어려워지면서 일부 농가는 소중히 키운 밭을 갈아엎는 지경에 이르렀다.
벼 수확을 기다리던 지역에서는 장기간 내린 비로 벼 생육이 부진했으며, 곰팡이병인 깨씨무늬병이 번졌다. 특히 영동 지역은 극심한 가뭄을 겪은지 불과 20여 일 만에 논밭이 침수되는 이중고를 겪었다. 가뭄으로 자라지 못한 벼가 비까지 맞으면서 수확 작업이 지연됐고, 물을 머금은 벼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현상이 나타나는 등 햅쌀 품질 저하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삼척시의 경우 16일 기준 총 벼 재배면적 중 61%가 미수확 상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을장마로 쓰러져버린 삼척의 논 ⓒ 삼척시]
벼뿐만 아니라 배추, 사과, 감자 등 다른 작물도 직격탄을 맞았다. 일조량 감소로 과일 당도가 떨어지고, 필요 이상의 수분 흡수로 과일이 터지는 열과 현상이 발생해 상품성이 크게 하락했다. 김장철 배추는 무름병과 노균병(잎이 노랗게 변하는 현상) 등 주요 병해충 발생 위험이 높아졌다. 여기에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으로 냉해 피해 우려까지 더해지면서, 농가의 불안은 커져만 가고 있다.
단풍 대신 비, 변해버린 가을 풍경
짧은 가을을 스쳐 지나간 비구름은 익숙한 가을 풍경마저 바꿔놓았다. 단풍 명소를 찾은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물들지 않은 잎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0월 중순까지 여름 더위가 이어지다 단풍이 다 물들기도 전에 추운 날씨가 시작되면서, 단풍 형성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늦어진 단풍 시기에 잦은 비와 높은 습도까지 겹치면서, 단풍 색이 선명하게 들지 않거나 잎이 빨리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10월 말~11월 초로 예상되는 단풍 절정 시기 ⓒ 농민신문]
산림청이 발표한 '2025 산림단풍 예측지도'에 따르면 올해 단풍 절정 시기는 지역별로 10월 말~11월 초가 될 전망이다. 이는 평년보다 최대 7일 늦어진 것으로,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지연된 결과다. 즉, 가을장마를 비롯한 이상기후 현상이 단풍철마저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익숙했던 계절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10월 셋째 주까지 이어지던 가을장마가 끝나자마자,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급격한 한기가 찾아왔다. 가을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셈이다. 10월 20일 설악산은 최저기온이 영하 1.3도까지 떨어졌고, 설악산 고지대에서는 1㎝가량 첫눈이 쌓였다. 단풍이 채 물들기도 전에 눈이 내리며 계절의 순서가 뒤섞였다. 이와 같은 비정상적 계절 교란은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것이다.
[10월 20일 설악산 국립공원 소청대피소에 내린 첫눈 ⓒ 설악산 국립공원 사무소]
올해 유난히 길었던 가을장마는 계절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다. 이제 ‘가을다운 날씨’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기후변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환경 속에서, 우리는 변해가는 계절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다.
by Editor N